



학생의 지극정성어린 헛소리를 보고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 길게 답문을 하겠습니다. 지금 시점에서 학생이 ‘학생’이라는 이유로 좀 더 아량을 베풀 이유는 없어보입니다. 학생의 주장을 여러 개로 쪼개놓고 개별적으로 답하는 방식으로 진행하겠습니다.
▶️ 첫 주장부터 사실관계가 틀렸습니다. 계엄령이 대통령의 권한이기는 하나 우리 헌법은 계엄령의 행사를 극히 제한된 상황에서 발동하도록 규정합니다. 여기서 ‘제한된 상황’이란 전시, 사변, 또는 그에 준하는 비상상황을 의미합니다. 당신이 근거로 제시하고 있는 ‘무분별한 탄핵’, ‘예산 삭감’은 이러한 비상상황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예산 삭감이나 무분별한 탄핵으로 인해 기존 경찰력으로 치안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도 아니었고, 군대를 투입해야 할 소요사태 또한 발생한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당장 군대로 시민들을 통제해야 할 만큼 전쟁이 임박한 상황도 아니고, 열전이 치뤄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첫 주장부터 사실을 호도해버리면, 나는 당신이 지적 근거를 갖추고 토론에 임하려는 것이 아니라 악의를 가지고 선동하려는 악질적 유겐트라고 불러드릴 수 밖에 없습니다.
▶️ 게다가 윤석열의 계엄령 행사는 지극히 월권적인 내용으로 채워졌습니다. 포고령 1호에는 계엄권에서 규정하고 있지도 않은 행위를 명시하고 있습니다. 국회를 포함한 정치활동을 금지시킨 게 대표적입니다. 계엄권 어디에도 계엄령을 통해 대통령이 국회를 통제할 수 있다는 문구는 명문화되어 있지 않습니다. 계엄포고령 1호는 명백한 월권과 위법의 증거입니다. ‘대통령 고유 권한’이면, 헌법에 명시되어 있지 않은 통제권을 행사해도 된다는 말인가요? 그건 당신이 비상사태를 이유로 대통령이 법의 통제를 벗어나 신권처럼 통제받지 않는 권력을 휘둘러도 된다는 주장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불행하게도) 대한민국은 법치국가이며, 윤석열의 위법한 행위와 의도는 그가 국회로 실제로 군대를 보냄으로써 증명되었고 목격되었습니다. 또한 절차상 흠결 역시 다수입니다. 윤석열은 국무회의 심의절차를 준수하지 않았고, 계엄 선포 절차 또한 국무위원의 ‘부서’ 없이 강행되었다는 점, 국회에 대한 통고 역시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 등이 대표적입니다. 대체 어디에 뭐가 ‘합법적’이라는건가요?
▶️ 당신이 ‘하이브리드전’ 운운하며 근거로 제시한 선관위 해킹이나 군사기밀 유출 사건은 ‘계엄령’으로 해결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먼저 지적해야겠습니다. 당신은 계엄령의 본질적 속성과 효과조차 모른 채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 같군요. 계엄령은 기본적으로 기존의 치안력으로 질서 유지가 어려울만큼 비상한 상황에서 군대를 동원해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고 통제를 극대화하는 통치행위입니다. 당신 눈에는 선관위의 보안사항을 강화하거나 군사기밀 유출에 대해 강력히 처벌하고 보안 체계 강화를 주문하는 것보다 계엄령으로 국민 기본권을 제한하고 통제하는 게 문제 해결에 더 효과적인 것으로 보이나봅니다. 대체 어떤 프로세스로 ‘계엄령’을 통해 당신이 제시한 ‘하이브리드전’을 극복할 수 있다는 건가요? 안보 위협은 안보 관련 투자를 늘리고 군대의 전투력을 증진하면서 현대의 전장상황에 맞는 체계를 구축하면서 대응하는 게 합리적이라고 보는데, 혹시 당신이 보는 안보위협의 해소방안은 계엄령으로 민주당 정치인들을 싸그리 잡아들이고 (윤석열이 규정한) 반국가세력을 전부 처단하면 해결되는 문제인가요? 대체 계엄령으로 당신이 주장하는 ‘하이브리드전’을 어떻게 극복하겠다는건가요?
▶️ 두번째로, ‘계엄령이 실제로 빠르게 해제되었다’라는 주장도 왜곡된 주장입니다. 헌법에 계엄령은 ‘지체없이’ 해제하여야 한다고 명문화되어 있으나 윤석열은 ‘지체없이’라는 표현과는 거리가 멀게도 몇 시간이나 지나서야 해제했습니다. 국회에서 계엄 해제를 의결한 뒤 바로 해제한 게 아닙니다. 심지어 그 ‘몇 시간’이라는 시간 텀 사이에는 2차 계엄을 계획한 게 아니냐는 의혹까지 있습니다. 뭘 윤석열이 마치 자비롭고 자애로운 어버이인 양 묘사를 하세요. 당신의 신앙 간증은 관심 없습니다만 글 곳곳에 당신의 신앙 간증이 보여서 짜증날 지경입니다.
▶️ 이 역시 학생이 사실을 완전히 호도하고 있는 주장입니다. 헌재 판결문에 명확하게 명시되었듯이, 대통령이 계엄령을 발동하였다 하더라도 선관위에 대해 할 수 있는 조치는 ‘없습니다.’ 선관위는 독립된 헌법기구입니다. 선관위가 ‘독립적 기구’라는 의미는 선관위에 어떤 식으로든 권력의 입김이 들어갈 수 있는 통로를 제도적으로라도 차단해야 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헌재 판결문을 인용합니다: ①“선거관리사무는 그 성격상 행정작용에 해당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헌법이 위와 같이 해당 사무의 주체를 독립된 합의제 헌법기관으로 규정하면서 그 독립성과 중립성을 강조하는 체계를 택한 것은, 공정한 선거관리를 위해서는 외부 권력기관, 특히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행정부의 영향력을 제도적으로 차단하여야 한다는 확고한 의사가 반영된 것이다.” ② “그런데 피청구인은 헌법과 법률이 예정하지 않은 방법으로 군대를 동원하여 중앙선관위 청사에 무단으로 들어가 선거관리에 사용되는 전산시스템을 압수․수색하도록 하였다. 이는 선관위의 선거관리사무에 대한 부당한 간섭이자 선거가 지니는 본래의 민주정치적 기능에 위협을 가하는 행위로서, 선관위의 독립성을 철저히 보장하고자 하는 우리 헌법의 취지에 반하는 것이다.”
▶️ 이러한 결정에 비추어볼 때 “헌법상 독립기관이라는 지위가 책임 회피의 면죄부가 될 수 없다”는 당신의 주장은 헌법을 부정하겠다는 말로 해석됩니다. 선관위의 신뢰가 많이 떨어졌다는 주장은 일견 수긍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기관 신뢰도를 조사하는 지표에서 선관위 신뢰도가 제법 떨어진 것으로 나오니까요. 그러나 최근에는 다시 상승했습니다. 한국리서치는 한 해 2번, 상반기 하반기에 나누어 헌법기관의 신뢰도를 조사하는데, 2025년 상반기 헌법 기관 신뢰도에서 선관위는 헌재, 국군에 이어 3번째를 기록했습니다. 물론 못하고 있다는 평가가 높기는 합니다만, 대체로 헌법기관의 역할수행 평가는 ‘못하고 있다’는 평가가 대체로 다수로 나온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는 있겠지요. (사진 첨부)

▶️ 또 하나, 현재 전 세계 민주주의를 측정하는 가장 권위있는 지표인 V-Dem (민주주의다양성)에서도 하위 세부지표 중 각 국가의 선거관리기구(EMB, Electoral Management Body)의 역량을 평가하는 지수가 있습니다. 이 지표는 크게 두 개로 나뉘는데, 선거관리기구의 역량(선거를 공정하고 투명하게 관리하는 능력)과 선거관리기구의 자율성(정부로부터 부당한 개입을 받지 않고 자율적으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가?)으로 나뉩니다. (정확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Does the Election Management Body (EMB) have autonomy from government to apply election laws and administrative rules impartially in national elections?”)
▶️ 위 두 가지 지표에서 한국은 비교군으로 선정한 미국, 영국, 일본, 대만에 비해서도 상당히 역량 있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오히려 선관위의 자율성의 경우 윤석열 정부 들어 지표가 하락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구체적인 세부 케이스까진 데이터가 제공하지 않고 있으므로 추측의 영역입니다만, 윤석열 정부에서 지속적으로 선관위에 영향을 끼치려 했던 사건들이 몇몇 떠오르긴 하네요.
